소비자는 왜 350만원짜리 에르메스 샌들을 살까[송승섭의 금융라이트]
주요 명품 브랜드 회사들이 새해 가격 인상을 단행했습니다. 안 그래도 비싼 명품 가격이 줄줄이 올랐죠. 한 번에 이렇게 많이 올라도 되나 싶을 정도로요. ‘명품 업계가 배짱 장사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명품 회사들은 경제적 이론에 따라 수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아주 좋은 방법을 선택한 것이죠.
실적 주춤해도 명품 가격은 계속 오른다프랑스의 명품 브랜드 에르메스는 올 초 국내에서 판매하는 신발제품 가격을 최대 40%가량 올렸습니다. 오란(Oran) 샌들 중 도마뱀 가죽으로 만든 상품의 가격은 245만원에서 352만원으로 43.7% 인상됐죠. 스위스 명품 시계 롤렉스는 국내 판매가가 약 8%씩 올랐습니다. 롤렉스 인기 제품인 데이트저스트(Datejust) 36mm 사이즈는 1142만원에서 1239만원이 됐죠.
명품 회사들이 올해에만 유독 가격을 올린 걸까요? 아닙니다. 프랑스의 또 다른 명품 브랜드 샤넬은 올해 초 주얼리와 시계 가격을 4~5% 정도 올렸는데요. 지난해에는 2월과 5월에 제품 가격을 인상한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1년에 한 번 올리는 것도 아니고 여러 차례 가격을 올리면서 ‘N차 인상’의 대표주자로 자리매김했고요. 다른 명품 회사들도 마찬가지라 사실상 연초 가격 인상이 연례행사처럼 됐다는 얘기도 나옵니다.
명품 브랜드가 가격을 올린다고 해서 ‘여전히 잘 팔리고 있구나’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코로나19 시기 보복소비로 큰 수익을 올렸던 명품 회사들은 고금리·고물가 현상이 장기화하면서 주춤하고 있습니다. 세계 1위 기업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의 3분기 매출증가율은 전년 동기대비 9%입니다. 17%였던 전 분기와 비교하면 크게 줄었죠. LVMH 최고재무책임자(CFO)인 장 자크 기오니가 “3년 동안의 눈부신 호황기가 끝났다”라고 말했을 정도로요.
그런데 이상하지 않나요. 제품이 팔리지 않아서 수익률이 줄었는데, 가격을 유지하거나 내리기는커녕 오히려 올린다니요. 제품의 품질에 아무런 변화도 주지 않았는데 가격을 올린다면 합리적인 소비자가 돈을 쓸 리가 없죠. 수요-공급 곡선과도 상충합니다. 가격과 수요량은 반비례 합니다. ‘가격이 낮으면 수요량이 증가하고, 가격이 높으면 수요량이 감소한다’는 건 아주 당연한 상식이잖아요. 왜 명품 회사들은 실적 위기에 가격 인상을 단행했을까요?
‘부자들은 자랑을 위해 소비한다’…베블런 효과의 탄생황당하게 들릴 수 있지만 어떤 물건이나 서비스는 가격이 비싸질수록 더 많이 팔리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현상을 ‘베블런 효과’라고 합니다.
베블런 효과는 미국의 경제학자였던 소스타인 베블런이 1899년 출간한 ‘유한(有閑)계급론’에서 처음 제시한 말입니다. 베블런은 1857년부터 1929년까지 살았습니다. 당시 전 세계는 산업화를 통해 생산의 효율성을 높이 끌어올렸습니다. 자연스럽게 천문학적인 돈을 번 사람들도 나타났죠. 베블런은 이 신흥부자들을 유한(한가롭게 노는 사람들)계급이라 불렀고요. 벼락 부자가 된 사람들이 ‘어디에 어떻게 돈을 쓰는지’ 살펴본 뒤 쓴 책이 유한계급론입니다.
베블런이 부자가 된 사람들의 소비 방식을 들여다봤더니 기존의 경제학 이론과 전혀 다른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바로 ‘과시적 소비’입니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소비를 한다는 거였죠. 품질에 별다른 차이가 없어도 비싼 상품을 구매하는 식으로요. 소비의 동기는 효율성이나 합리성이 아니었습니다. 주변에서 보내주는 부러움과 시기 질투, 사회적인 자의식 충족이 소비의 큰 목표였죠. 자신의 재력을 더 과시하기 위해 더더욱 비싼 물건을 찾았고요.
물론 자랑하고픈 마음에 물건을 사는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러니까요. 다만 베블런은 ‘모방적 소비’를 우려했습니다. 부자가 아닌 사람들도 부자와 똑같은 제품을 구매하고 싶어 하는 거죠. 시간이 지나면 가격이 비싼 소비나 여가생활이 사회 전반에서 유행하게 된다는 게 베블런의 주장입니다. 결국 과시적 소비가 사회 전체의 일반적 소비로 번지면서 지나친 소비행태라는 문제를 불러일으키고요.
베블런의 분석이 기분 나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스스로 과시적 소비나 모방적 소비를 한다고 인식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까요. 좋은 재료와 장인의 손길이 녹아있는 훌륭한 명품을 합리적으로 소비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죠. 다만 명품을 구매한 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인증샷을 올리며 기분이 좋아졌다거나, 유명 연예인이 착용한 명품을 보고 따라 샀다거나, 친구들에게 본인의 명품을 칭찬받아 우쭐했던 기억이 있다면 베블런의 분석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명품·오마카세·호캉스 따라해야 행복할까?
베블런 효과에 입각한다면 명품 회사들은 돈을 벌기 위해 가격을 올려야만 합니다. 거꾸로 어떤 명품회사가 가격을 내렸다고 생각해볼까요? 많은 사람이 제품을 구매하게 될 겁니다. 당장은 매출이 오를 수 있지만, 부자들의 발길은 끊어질 겁니다. 너도나도 가지고 있는 제품은 더 자랑할 가치가 없거든요. 부자들이 사지 않으면 어느 순간부터 일반 소비자들도 지갑을 닫습니다. 부자처럼 보이려고 명품을 따라 샀는데, 이제 부자들이 외면하는 브랜드가 됐으니까요.
그러니 가격을 올리는 명품 회사를 무작정 욕할 필요는 없습니다. 기업은 돈을 버는 게 목표고, 이를 위해 가장 합리적인 방법을 선택한 것이니까요. 오히려 명품회사에 ‘가격을 좀 내리라’고 말한다면 ‘망해라’라고 외치는 것과 똑같은 말이겠죠. 게다가 돈이 많은 사람이 명품처럼 비싼 물건을 사는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법적·윤리적으로 정당한 소비라면 본인의 재산에 맞춰 소비하는 부자들을 무작정 매도해서는 안 됩니다. 설사 허영심 때문에 물건을 산다고 해도 말이죠.
다만 베블런의 유한계급론을 통해 우리가 되돌아볼 만한 지점은 분명 있습니다. 베블런은 유한계급론에서 ‘상층계급의 두드러진 소비는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기 위하여 자각 없이 행해진다’고 비판했습니다. 부자가 아닌데도 부자처럼 소비하는 행위는 바람직하지 못하겠죠. 남들이 고급 오마카세 식당에 간다고 따라나설 필요도 없고요. 호캉스에서 비싼 호텔 음식을 먹어야만 삶이 반드시 행복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명품이 사람의 값어치를 증명하지도 않고요. 중요한 건 본인의 인생에서 진짜 행복함을 주는 값어치 있는 제품에 소비하는 합리성일 겁니다.
편집자주경제와 금융은 어렵습니다. 복잡한 용어와 뒷이야기 때문이죠. 금융라이트는 매주 알기 쉬운 경제·금융 이야기를 전달합니다. 사전지식이 전혀 없어도 술술 읽히는 이야기로 경제·금융에 ‘불’을 켜드립니다.
세종=송승섭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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