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통에 수장돼 사라진 친구들”…영화숙·재생원을 기억하라

“똥통에 수장돼 사라진 친구들”…영화숙·재생원을 기억하라

지난 1월25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국회의사당 본관 앞 계단에서 열린 ‘진실화해위 기본법 개정 촉구 집회’ 때 손석주 대표가 앞에 나와 발언을 하고 있다. 고경태 기자

‘충격적인데…마음 아픈데…슬픔에 휩싸여야 하는데…마음 한편에서 터져 나오는 이 박탈감은 무엇일까.’

2022년 10월30일, 티브이(TV)에서 이태원 참사 속보를 보던 그가 벌떡 일어났다. 그동안 잊으려 했던, 지난 일로 치부하고 돌아보려 하지 않았던 어떤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와 머리를 때렸다. 어디론가 가야 했다. 과연 어디로 가야 내 억울함을 알릴 수 있을까.

경남 양산시청 기자실을 혼자 지키고 있던 국제신문 양산 주재 김성룡 기자가 그를 맞았다. “여기가 기자들 있는 곳 맞나요?” “그런데요. 누구시죠?” “저는 손석주라고 합니다. 할 말이 있어서 왔어요. 꼭 좀 들어주세요.” “무슨 말씀을….” “기자들이 지금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있어요. 형제복지원 아세요? 선감학원 아세요? 영화숙·재생원은 모르죠? 형제복지원과 다를 게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왜 부산지역 신문에서도 다루지 않나요?”

지난 회 소개한 한종선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모임 대표가 “꿈이 뭐냐”는 영화 속 톰 크루즈의 한 마디에 자극을 받아 국회 앞으로 갔다면, 이번회 주인공인 손석주(62) 영화숙·재생원 피해생존자협의회 대표는 이태원 참사 뉴스를 보다가 경남 양산시 집에서 가장 가까운 기자실로 갔다.

“나는 어린 나이에 아무 죄없이 납치돼 굶주림에 시달리며 맞았는데, 그곳에서 내 친구들은 말할 수 없이 비참하게 죽었는데 50년이 흘러도 왜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가”하는 분통이 치밀어올랐고, 기자를 만나야겠다는 결심으로 이어졌다.

“똥통에 수장돼 사라진 친구들”…영화숙·재생원을 기억하라

영화숙·재생원의 아이들. 영화숙 원장 이순영을 고발해 시설 폐쇄를 이끈 알로이시오 신부가 찍은 것으로 전해진다. 소 알로이시오 연구소 제공

이태원 참사가 이끈 언론 제보

양산시청 기자실 방문 뒤 국제신문 사회부가 영화숙·재생원 문제를 본격 취재했다. 손석주의 증언은 2022년 11월1일 국제신문 1면 머리로 보도됐다. 제보의 계기가 된 이태원 참사로부터 불과 3일 뒤였다.

이미 많이 알려졌지만, 70년대 형제복지원을 세운 박인근 원장이 그대로 가져다 똑같이 베낀 모델이 영화숙·재생원이다. 1950~1960년대 부산 지역에서 규모가 가장 큰 집단수용 시설이었다. 1960년대 후반 한 해 1200여명을 수용할 정도였다.

그러나 1971년 7월 재단법인 마리아 수녀회 대표 소 알로이시오(1930~1992, 한국명 소재건, 미국명 알로이시오 슈월츠)가 영화숙 원장 이순영을 고발하면서 1973년 1월 시설 인가가 취소된다. 중앙일보 1971년 5월5일치에는 이런 기사가 나온다. “영화숙 옆에 구호병원을 차리고 있는 알로이시오 신부는 ‘지난 10년 동안에 걸쳐 숱한 어린이들이 몽둥이로 맞고 발길에 채어 병신이 되거나 죽어가고 있는 사실을 볼 수 없고 지금도 원아들에 대한 폭행과 가혹 행위는 계속되고 있다’고 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지난해 8월18일 전체위원회에서 영화숙·재생원에 대한 직권조사를 의결했다. 굶주림·구타·성폭행·강제노역·횡령 등 불법 행위 피해의 심각성을 인정한 것이다. 2024년 2월 현재 진실화해위는 영화숙·재생원 피해 진실규명을 신청한 7명 이외에도 직권조사를 통해 진실규명 대상자 27명의 진술조사를 완료했다고 한다.

국제신문 보도가 나간 뒤 영화숙·재생원 피해생존자 80여명을 규합해 협의회를 만든 손석주 대표는 1971년 만 아홉살이 되던 해에 신문을 팔다가 재생원에 끌려간 뒤, 두달 만에 영화숙으로 옮겨지기 직전 탈출했다. 2년 뒤 또 끌려갔지만 이때에도 11개월 만에 탈출했다. 올해에는 피해생존자협의회 일에만 전념하겠다는 손 대표는 “피해자들이 모두 고령인 만큼 조사를 완료한 사람들만이라도 진실규명을 빨리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인터뷰는 서면과 전화통화로 진행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똥통에 수장돼 사라진 친구들”…영화숙·재생원을 기억하라

1960년대 영화숙·재생원의 외관. 소 알로이시오 연구소 제공

 

“똥통에 수장돼 사라진 친구들”…영화숙·재생원을 기억하라

1960년대 영화숙·재생원의 외관. 소 알로이시오 연구소 제공

나는 ‘있었던 일’만 이야기한다

― 대표 일 하신 지 1년 조금 넘었어요. 사람들 조직도 해야 하고, 행사 때 앞에 나가 마이크도 잡아야 하는데, 어렵지는 않나요?

“한 번도 안 해본 일이라 처음에는 굉장히 떨렸어요. 하지만 ‘있었던 이야기’만 하면 되니까 크게 어려울 건 없는 것 같아요. 영화숙·재생원에서 있었던 사실을 알리자고 시작한 거잖아요. 거기에만 중점을 두고 있어요.”

― 지난 1월25일 오후 국회의사당 본관 앞 계단에서 열린 ‘진실화해위 기본법 개정 촉구 집회’ 때 앞에 나와 하신 말씀 있잖아요. 죽은 아이를 똥통에 넣었다는 거, 믿기 힘들었어요. 직접 경험하셨나요?

“제가 겪은 일은 아닙니다. 다른 형님들에게 이야기를 들었어요. 영화숙에 변소(화장실)가 두 군데 있었어요. 대변 보는 곳이 8~10칸 정도 됐거든요. 그게 재래식 변소니까 밑은 하나로 돼 있잖아요. 가로 6m, 세로 10m가량 되는 크기였어요. 한마디로 큰 오물통인 셈이죠. 밤에 아이가 죽으면 산에다 묻지도 않고 거기에 담가버렸다는 거죠. 긴 막대기로 눌러서 떠오르지 않게 하고요. 몇 개월 지나면 시신이 삭아서 아무것도 남지 않는 거죠.”

“똥통에 수장돼 사라진 친구들”…영화숙·재생원을 기억하라

지난해 8월 영화숙·재생원에 대한 진실화해위의 직권조사가 결정된 후 한국방송(KBS) 부산 방송에 출연한 손석주 대표. 한국방송 화면 갈무리

왜 시신을 묻어주지 않고 변소에 버렸는가

― 왜 묻어주지 않고 변소에 버렸을까요?

“낮에는 아이들 시켜 야산에 파묻었어요. 그런데 밤에 죽으면 어떻게든 빨리 치워야 하니까 그런 식으로 한 거 같아요.”

― 그런 일이 자주 있었나요?

“가끔 있었대요. 워낙 많이 죽으니까요. 저도 같은 방에 있던 친구가 아침에 죽은 걸 본 적 있어요. 기상 시간에 깨워도 안 일어나길래 보니까 죽었더라고요. 그러면 가마니에 싸서 밖으로 내보내는 거죠. 산에 아무렇게나 묻었을 거예요.”

진실화해위 조사 과정에서도 신청인들은 무자비한 폭행으로 사망사고가 빈번히 발생했다고 진술했다. 신청인들은 “폭행 후 병원에 데리고 간다고 나간 원생이 다음 날 돌아오지 않는 경우도 많았고, 시신이 가마니에 덮인 채 수레에 실려 뒷산으로 옮겨지는 광경을 여러 차례 목격했다. 시신을 처리하는 방법으로 가마니로 말아서 뒷산 소나무와 소나무 사이를 무릎 정도 깊이로 파서 시신을 묻거나, ‘똥통(도심에서 가져온 잔반이나 분변을 버리는 영화숙 주변 늪지대)’이라고 불리는 곳에 수장시키는 방법이 이용됐다”는 진술을 하기도 했다. (손석주 대표는 이와 관련 “시신을 변소에도 버리고, 이런 늪지대에도 버렸다. 두 군데 모두 ‘똥통’이라 불렀다고 했다)

성폭행도 비일비재했다. 이런 내용도 있다. “재생원에서는 중대장과 소대장에게 성폭행을 당했어요. 얼굴이 반반하게 생긴 남자 원생들을 성폭행했어요. 그 사건 이후로 20대 중반부터 기저귀를 차고 다녔어요. 기저귀를 차지 않으면 대변이 흘러나왔어요.”(신청인 OOO) “같은 방에서 옆에 있던 원생이 우리 방으로 건너온 옆방 방장에게 성폭행을 당하는 소리를 옆에서 들었어요. 방장은 원생이 입으로 방장의 성기에 나쁜 짓을 하게 했고, 그 짓을 했어요. 원생이 우는 것을 옆에서 들었는데, 맞을까 봐 감히 쳐다보지는 못했어요. 폭행하는 것이 수시로 일어나서 다 말하기도 힘들어요.”(신청인 OOO)

“똥통에 수장돼 사라진 친구들”…영화숙·재생원을 기억하라

젊은 시절 구두 닦는 일을 하던 손석주 대표. 손석주 제공

진실화해위가 부산시를 압박해주길

― 지난해 제일 큰 일은 진실화해위의 직권조사였어요.

“직권조사는 저희가 너무나 바랐던 부분입니다. 큰 선물이었어요. 기뻤습니다. 그동안 정치인들도 무관심했잖아요. 이렇게 아무에게도 기억되지 못하고 사라지는 게 아닌가 걱정도 했고 막막했는데, 세상에 알려지고 피해자들도 모이고 너무 좋았습니다. 진실화해위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올해는 진실규명 결정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직권조사 결정 이후 진실화해위는 현재까지 신청인 7명과 그 밖의 27명에 대한 진술조사를 완료했어요.

“진실화해위 면담 신청을 해놓은 상태입니다. 2월 말에 가기로 했습니다. 이때 저희의 요구사항을 전달하려고 해요. 제가 알기로는 영화숙·재생원 피해자에 대한 진실규명이 연말에 된다고 하거든요. 저희가 아직 단 한 명도 진실규명 결정을 받은 사람이 없잖아요. 그래서 부산시로부터 피해자 대접을 받고 있지 못해요. 부산시가 형제복지원 피해자를 위한 조례를 만들어 지원을 해주고 있는데, 진실규명만 되면 저희 피해자들이 같은 혜택을 받을 수 있거든요. 그래서 어떻게든 진술조사가 완료된 사람만이라도 먼저 진실규명 결정문을 내달라고 요청하려 합니다. 최근 지역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인권·노동 정책 전담 활동을 하는 부산시 민생노동정책관이 폐지 수순을 밟고 있다고 해요. 이렇게 되면 국가폭력 생존피해자들에 대한 부산시의 지원이 약화할 수 있잖아요. 시간이 자꾸 지체되면 진실규명이 돼도 부산시에서 이를 담당할 부서가 사라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큽니다.”

― 진실화해위에 더 바라는 게 있나요?

“좀 더 적극적으로 대처를 해주었으면 해요. 지금은 되게 소극적이라고 느껴져요. 부산시 문서고 어딘가에 저희 자료가 남아있을 텐데, 진실화해위에서 찾을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특히 부산시 민생노동정책관이 폐지될 수도 있는 판에, 자료들을 순순히 내주지 않을 거 같고요. 부산시가 연구용역이라도 하게 해서 자료를 찾아내는 방법도 있지 않을까 싶어요. 진실화해위가 어떻게든 부산시에 압박을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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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숙·재생원 피해생존자협의회는 지난해 10월23일 처음으로 피해사망자를 위한 위령제를 지냈다. 손석주 제공

하루라도 빨리 진실규명 결정문 받기를

― 2023년은 피해생존자협의회가 조직된 해였는데, 의견 통일은 잘 되나요?

“괜찮습니다. 지난해 모임을 두 번 했거든요. 10월23일엔 처음으로 영화숙·재생원 피해사망자 위령제를 했어요. 그때 피해생존자들이 한 30명 가까이 모이기도 했어요. 피해자들은 다 고령이에요. 제가 올해 예순둘인데 협의회 내에서는 가장 막둥이입니다. 그래서 이런 특성에 맞게 활동을 해야 하잖아요. 고령자인 데다가 대부분 연고자가 없이 혼자 생활하시니까 갑자기 돌아가시면 장례 치러 줄 사람이 없는 것도 큰 문제예요. 이걸 해결하기 위해 1월에 공영장례를 위한 첫발을 뗐고요. 저를 포함한 6명이 본인 세상 떠나면 장례를 우리 피해자협의회에 일임한다는 위임장을 썼어요. 3월에 6명이 또 위임장을 쓰기로 했어요. 올해 설날에 피해자들 5명이 모여 떡국 먹으면서 얘기했어요. 공영장례 더 신경 써야 한다고요. 그리고 다들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니까 하루라도 빨리 진실규명 결정문을 받고 사법부 판단을 거쳐 보상 문제가 마무리됐으면 좋겠다고 이야기를 모았어요. 모두 잘 따라주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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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14일 오후 서울 중구 퇴계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앞에서 열린 영화숙·재생원 직권조사 촉구 기자회견에서 한 피해자가 자신의 사례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 뒤가 손석주 대표. 김정효 기자 [email protected]

손해배상 액수보다 더 중요한 것

― 형제복지원은 지금 손해배상 재판이 진행되고 있어요.

“형제복지원 피해자 단체는 지금 여럿 갈려 있잖아요. 따로따로 재판을 진행하고 있어요. 우리는 그렇게 하면 안 되겠다 생각해요. 저희 피해자 형님들 만나고 할 때마다 가장 당부하는 게 그겁니다. 개인행동 하지 말자고요. 지금 직권조사 진행 중이니 빨리 사법부 판단까지 받도록 함께 행동하자고 누누이 말씀드립니다. 그 일환으로 우리 협의회 같은 경우에는 회원들 간 전화번호를 전체 공유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 형제복지원 재판에서 사법부는 국가 책임을 인정했어요. 1년 감금 기준에 피해보상액을 8천만원으로 산정했다고 하던데요.

“저희 입장에서는 많이 주면 줄수록 좋기는 합니다. ‘1년에 8천만원’이라는 금액에 관해 좀 과하다는 분도 계시고, 적다는 분도 계세요. 영화숙·재생원에서 인생이 망가져 버렸는데 어떻게 금액으로 따질 수 있겠느냐마는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8천만원이든, 아니든 액수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진실화해위 진실규명과 재판이 빨리 종결됐으면 좋겠어요. 영화숙·재생원이 더 오래된 시설이다 보니, 저희 피해자들이 형제복지원 피해자들보다 훨씬 나이가 많잖아요. 세상 떠나는 데 순서가 없겠지만, 소송 결과 나올 때까지 살아계시는 분이 얼마나 될까 하는 걱정을 하는 거지요. 예를 들어 1년에 8천만원이 아니라 8억원을 준다 해도, 그 돈 받아서 10원이라도 써보고 돌아가셔야 할 거 아닙니까. 죽고 나서 그게 무슨 소용이 있냐는 거죠.”

“똥통에 수장돼 사라진 친구들”…영화숙·재생원을 기억하라

맨 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영화숙·재생원 피해생존자 황송환, 배영식, 김귀철, 손석주, 김성철, 박상종 씨. 전상규 작가가 공영장례 위임장을 작성한 이들을 위해 찍은 영정사진이다. 손석주 제공

아직도 남은 야산 터…유해발굴 꼭 됐으면

― 영화숙·재생원에서 돌아가신 분들에 대한 유해발굴 계획은 있으신가요?

“저희는 당연히 하고 싶죠. 부산시나 진실화해위 의지가 중요한데요. 할 수 있으면 꼭 했으면 좋겠습니다. 부산시 사하구 신평동(옛 서구 장림동) 야산 터가 아직 그대로 남아있거든요.”

― 현장에 가보셨나요?

“몇 번 가봤어요. 형님들이 시신을 묻은 위치를 다 기억하고 계시더라고요. 지게로 시신을 지고 나가 직접 묻은 분들이 적지 않아요. 이 부분은 진실화해위와 이야기를 해봐야죠. 선감학원도 진실화해위에서 유해발굴을 했고, 또 경기도가 한다고 하잖아요. 형제복지원 피해자들 유해발굴은 현재 불가능합니다. 형제복지원이 있던 사상구 주례동 산18번지 일대는 지금 다 밀어버리고 아파트촌이 들어섰잖아요. 참 안타까운 게 뭐냐면 아파트 공사를 하면서 분명히 유해가 나왔을 거란 말이에요. 그 유해를 어떻게 처리했을까요? 신고가 갔을 텐데 혹시 공사 지연될까 봐 다 모른 체하고 넘어가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이 드는 거지요. 2월말에 진실화해위랑 면담할 때도 유해발굴에 대한 이야기를 분명하게 하려고 합니다.”

이순영 주변에 기생한 악마들

― 영화숙·재생원 이순영 원장 보신 적 있나요?

“두 번 봤어요. 어릴 때 기억이지만, 몸이 통통했고 눈매가 날카로웠지만 그렇게 험상궂게 생기지는 않았어요. 우리 아동들을 데려다 착취해서 제 주머니를 채운 사람이잖아요. 저는 이순영보다 그 사람 주위에 기생했던 사람들이 더 나빴다고 생각해요. 영화숙·재생원은 부산시와 위탁 계열을 체결하고 운영됐던 곳이에요. 그럼 운영 과정에서 부산시 공무원들은 도대체 무엇을 한 건가요? 이순영 뒤에 국회의원도 있었고, 고위층 권력자도 있었다고 하거든요. 이렇게 이순영이 복지사업 간판을 걸고 사업을 할 때, 이순영을 비호한 무리가 더 악마였다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들이 더 미워요. 그들은 그때 축적한 부를 자기 자식들에게 물려줬겠죠? 저희가 고통받고 있을 때 번 돈으로 지금도 대대손손 즐겁게 살고 있을까요?”

보건복지부 장관도 사과해야

― 사과를 받으셔야죠? 누가 사과를 해야 할까요?

“진실화해위 김광동 위원장이 지난해 직권조사 결정 직전인 7월28일 부산에 내려와 피해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조사가 늦어져서 미안하다’는 사과를 했어요. 진실규명이 이뤄진다면 정부의 누군가가 사과를 해야죠. 형제복지원의 경우 2018년에 문무일 검찰총장이 눈물의 사과를 했지만 이건 정부를 대신한 게 아니라 자신들의 직무유기에 대해 사과를 한 거고요. 형제복지원도 아직 국가 차원의 사과를 하지 않았어요. 대통령이 하면 좋지만 하겠어요? 영화숙·재생원은 당시 보사부(현 보건복지부)에서 허가권이 나온 거니까 보건복지부 장관이라도 사과를 해야 합니다.(기자 주―이에 비해 형제복지원은 내무부 훈령 410호에 따른 거라, 행정안전부가 내무부를 이어받는다) 위탁 계약을 체결한 부산시도 당연히 사과를 해야 하고요. 부산시는 2018년에 형제복지원 인권유린에 대해 피해자와 그 가족들한테는 공식 사과를 했어요.”

― 마지막으로 꼭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다면.

“영화숙·재생원 뿐 아니라 아직 알려지지 않은 수용시설이 많아요. 1986년에는 형제복지원 시설의 근거가 됐던 내무부 훈령 410호에 따라 36개소의 부랑인 시설에 1만6149명이 수용돼 있었다고 해요. 그 수용시설에 있었던 피해자분들이 아직도 피해 구제받을 방법을 몰라요. 1950~1960년대 수용시설에 계셨던 분들은 더할 나위 없구요. 진실화해위 같은 기구가 있는지 모르는 분들이 허다합니다. 그분들이 살아계신다면, 돌아가시기 전에 수용시설에서 당한 일을 한 줄이라도 언론에 알리게 되기를 빕니다. 그래서 저희처럼 어떤 식으로든 협의회도 만들고 회복할 길을 찾아 나갔으면 해요. 지금도 부산 시민들한테 ‘영화숙·재생원 아냐’고 물어보면 잘 몰라요. 정말 모릅니다. 그렇게 언론에 기사가 나가도 잘 몰라요. 만약 이 글을 보는 분들이 저희와 똑같이 억울한 일을 당했다면 어떨까요? 그걸 역으로 생각해서 저희 심정을 좀 많이 헤아려주셨으면 합니다.”

“똥통에 수장돼 사라진 친구들”…영화숙·재생원을 기억하라

1970년 6월24일 국제신문(당시 국제신보)에 실린 영화숙 관련 기사. 국제신문 제공

“똥통에 수장돼 사라진 친구들”…영화숙·재생원을 기억하라

1970년대 초반 가톨릭시보에 실린 영화숙 관련 기사. 부산의 소 알리이시오 신부가 1백만명 서명운동을 한다는 내용이 제목에 있다. 소 알로이시오 연구소

영화소 또는 영아소로 잘못 알려졌던 이름

2022년 11월1일부터 영화숙·재생원 인권침해 사건을 연속보도한 국제신문 신심범 기자는 한겨레에 보내온 메일에서 “이미 그 전에 영화숙·재생원에 대한 제보 아닌 제보를 들었으나 ‘너무 옛날 일인데 말만 듣고 어떻게 취재하나’ 싶어 한 귀로 듣고 흘렸던 기억이 있다”고 했다. 그 제보를 해 준 이는 다름 아닌 신 기자의 어머니였다. 외가가 영화숙·재생원이 있던 부산 사하구 신평동이라 동네에 ‘영화소’와 ‘재생원’이라는 곳이 있으며 애들이 많이 맞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영화숙’이라는 이름을 잘못 알고 있기는 손석주 대표도 마찬가지였단다. ‘영화소’ 또는 ‘영아소’로 틀리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번에 영화숙·재생원의 옛날 사진을 제공해준 김남경 소 알로이시오 연구소장은 “영화숙과 관련된 위험한 일은 소 알로이시오 신부님께서 전적으로 혼자 감내하셨다. 수녀들은 당시 아이들의 엄마 역할에만 충실해서, 당시 영화숙이 어떤 사정에 있었는지는 훗날 신부님 자서전을 통해 알게 됐다”고 말했다. 당시 마리아 수녀회를 운영한 소 알로이시오 신부는 영화숙·재생원 원장 이순영을 고발해 입건하고 시설 폐쇄까지 이끌었다. 영화숙·재생원에 있던 아이들은 마리아 수녀회가 운영하는 부산 소년의 집으로 전원 되었다.

“똥통에 수장돼 사라진 친구들”…영화숙·재생원을 기억하라

지난해 11월28일 영화숙·재생원 피해자 4명이 다른 인권침해 사건 유족들과 함께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가 주최한 세계인권선언 75주년 기념 열린음악회에 초대되었다. 앞줄 왼쪽서 세 번째가 송두환 인권위 위원장, 뒷줄 왼쪽서 두 번째가 손석주 대표. 인권위 제공

중국집 배달일 그만두고 협의회 활동 매진

손석주 대표는 지난해 12월 오랫동안 몸담았던 중국집 배달일을 정리하고 영화숙·재생원 피해생존자협의회 일에만 몰두하고 있다. 협의회 조직을 꾸리면서 피해자들을 만나다 보니 배달 일을 빠지게 되었고, 결국 눈총을 받지 않을 수 없었노라고 했다. “제가 참 힘듭니다”라는 사장님의 말을 듣고 너무 미안했다고 한다. 당장 생계 전선이 흔들리지만 당분간 이쪽 협의회 일에 매진하는 게 맞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피해생존자협의회의 막둥이 대표로서 형님들을 다독이면서 올해 진실규명 결정이 빨리 이뤄지도록 박차를 가하겠다고 했다.

처음 손석주 대표에게 보낸 질문지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 “아홉살에 영화숙·재생원에 끌려가지 않고 다른 삶을 살았다면 어땠을까요?” 그는 띄어쓰기가 하나도 안된 답을 짧게 보내왔다.

“수용시설로가는일없고다시태어난다면저는공부하는학자가되고싶고.제가좋아하는역사공부를하고싶어요.그리고가족을만들어행복하게살고싶어요.”

마지막 문장이 찡했다. 가족은 없지만, 협의회 형님들이 가족을 대신한다. 학자는 되지 못했지만, 지금 현장에서 역사공부를 톡톡히 하고 있다. 인권운동의 최전선이자, 역사를 바꾸는 최전선에서.

고경태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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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피의자 조사…”공수처에 검찰 관계자 고소” ‘대선 허위보도 의혹’ 허재현 기자, 검찰 피의자 조사 (서울=연합뉴스) 조다운 이도흔 기자 = 지난해 대선을 앞두고 윤석열 대통령에게 불리한 허위 보도를 했다는 의혹으로 수사받는 ... Read more »

‘담배 모르는 세대’ 세웠던 뉴질랜드…세수 모자라 금연법 철회

한 남성이 담배를 들고 있는 모습. 게티이미지코리아 다음 세대 완전 금연을 목표로 한 뉴질랜드의 야심적인 금연 대책이 폐기될 위기에 놓였다. 27일 출범한 뉴질랜드의 중도 우파 국민당 주도의 연정은 2009년 1월1일 ... Read more »

'수억 광고 수익 숨기고 해외 여행 유튜버', 재산 추적한다

‘수억 광고 수익 숨기고 해외 여행 유튜버’, 재산 추적한다 김동일 국세청 징세법무국장이 28일 정부세종청사 국세청에서 지능적 재산은닉 고액 체납자 집중 추적조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뉴스1 유명 유튜버 A씨는 매년 수억 ... Read more »

식사 직후 '과일' 먹는 습관… 당장 멈춰야 하는 이유

건강을 위해 매일 과일을 챙겨 먹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과일도 언제 먹느냐에 따라 몸에 끼치는 영향이 달라질 수 있다. 특히 식사 후 곧바로 과일을 먹는 습관은 오히려 독이 될 수 ... Read mor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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